드고아 출신 아모스는 양떼를 치고 뽕나무를 재배하던 농부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주전 8세기였는데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로, 솔로몬 이후로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최고의 풍요로움과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풍요로움과는 반비례하게 종교적·도덕적으로는 부패와 타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던 시기였기도 합니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세와 지위를 남용해서 압제와 착취를 일삼았고, 백성들 역시 온갖 악행과 탐욕, 그리고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와 말씀은 천대받았으며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일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가 물질적으로 번영을 누리는 시기였을지는 몰라도 영적으로는 암흑기였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런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먼저 아모스는 이스라엘 주변국들의 악행과 그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로서 심판의 필연성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어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을 선언하고, 그 심판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5장 말씀에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는데, 이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와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심판의 메시지를 외면하고 아모스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선포되고 30년 후에 그 심판의 날이 실현되었습니다. 온갖 우상 숭배와 죄악에 빠져 있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것입니다.

    이들의 심판의 원인에 대해서는 4장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로 그들은 물질적 풍요 때문에 교만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물질적인 풍요에 빠져서 불법을 행하며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였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자신의 욕심에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붙드는 신앙과 열정과 뜨거움이 약해진 결과입니다. 풍요로움과 번영을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찾고 감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절대로 죄를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회를 촉구하실 때 그 음성을 듣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들은 마음이 완고해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음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4:6-11).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바뀌지 않고 변화되지 않음으로 살 길이 끊긴 것입니다.

    오늘 이런 이스라엘에게 멸망이 선포되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는데,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처녀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 속에서 단 한번도 이방인에게 짓밟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돌아서지 않았으므로 이방 세력의 짓밟힘을 겪게 될 것이, 결단코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을 것입니다(3). 결국 그들은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회복의 날이며 구원의 날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다고 하였습니다(19). 아무리 심판과 재앙을 벗어나고 피하려고 해도 결코 그럴 수 없으며, 이스라엘에게 닥친 필연적 멸망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도 살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농부로 살아가고 있는 아모스를 부르셔서 이러한 심판의 메시지를 주고 계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길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방법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그것은 목사의 의도로 전해지는 말씀이 아니라 목사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찾고 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심령에서부터 신앙의 결단이 일어나고 그것을 계기로 믿음이 소생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결단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움직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 있는 순간에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고수하며 연약함에 대해 합리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야 살 길이 열려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데 있어서,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5). 이 세 곳은 다 성지이고 백성들이 거룩하게 생각하는 곳으로, 하나님을 반드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장소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을 만난 곳으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방종하면서 온갖 죄를 짓고 살아가다가 이 벧엘에 오면 용서받을 수 있고 회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또 길갈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요단강을 건너고, 그것에 감사하며 단을 쌓은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곳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이 세워지게 되었고, 그 땅은 부패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믿음의 조상이라 생각하는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고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땅 역시 타락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브엘세바로도 가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어디서든지 결단하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면 만나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마음의 결단이 일어나는 그곳이 성지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말세인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받는 우리가 전심으로 회개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 그것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잃고 여호와를 떠나고 은혜의 자리를 떠난 모습들에서 돌이키고 오직 하나님만 구해야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만 찾고 구함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