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이라고 불리는 나병은 당시 사회에서 격리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질병이었습니다. 나병은 고칠 수 없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깨끗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교훈은 당시 유대인들의 교만한 신앙의 모습들과 이방인의 겸손한 신앙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고 경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감사가 더 많고 더 나은 감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얻은 자는 적다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섯 번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 이방인의 모습을 보며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주는 진리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17:11). 갈릴리는 북부 쪽에, 사마리아는 중부 쪽에, 예루살렘은 남부 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는 한 마을에 들어가게 되시고, 거기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들은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한 채,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7:13).” 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쳐 불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원어적인 해석에 근거해 볼 때, 그들이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부른 것을 단순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들의 간절함과 절박함에 더 많은 비중을 둘 수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들려지는 소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신들의 나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생각과 지식과 믿음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김을 간구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성전에서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했던 세리(18:13-14),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던 베드로(5:8)는 예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긍휼히 베푸시는 예수님에 대한 기사가 등장합니다(17:5). 이러한 예수님의 긍휼하신 은혜가 아무 소망이 없고 고통 가운데 있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르고 찾는 자들에게 응답하셨고, 고통에서 구원받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7:14).” 이들 열 명은 모두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지금 나병이 온 몸에 퍼져 있는 이들은 제사장들에게 갈 만한 몸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제사장으로 간다는 것은 나병을 치료받기 위함이 아니라 나병이 완치된 후에 확인을 받으러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온 몸에 퍼져 있는 상태였던 그들로 하여금 제사장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가 온전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나병으로부터 고침 받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그로 인해 나병이 치료되고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발생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고 열 명 모두 제사장에게 가다가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깨끗함을 입고 유일하게 주님께로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 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병 치료라고 하는 육적 구원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경험하였는데, 성경은 이 구원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일들을 통해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따름으로 인해 진정한 구원이 임하도록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나의 필요가 채워지고 나의 소망이 채워지고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으로 인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구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천국의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오셨고, 이것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핵심 말씀입니다.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서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7:15-16).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우월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죄인 취급하며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의 사역 목적에 합당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께로부터 인정받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이고, 무슨 일을 경험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님께서 인정하고 기뻐하시는 믿음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의 육체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경험했다면 그것에서 안주하지 말고, 그것을 발판 삼아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끝까지 따르고 변치 않는 자, 끝까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자, 주님은 그런 자들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만족과 기쁨만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참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진정한 제자가 되시고 믿음까지 이르는 자들이 되어서, 구원의 은혜와 감격 속에서 늘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