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서 노아때 까지 약 1500년동안 인구증가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사람들은 장수하며 후손들을 많이 생산하는 번성을 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안에 있던 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8절에 보면, 아담에게 허용하시고 명하신 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복을 받아 번성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 마땅한 삶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의무며 책임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5-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탄하실 정도로 인간들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기쁨 얻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 때,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시며 예수님을 지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때 인간의 타락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사람들을 보고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영이라는 것은 루아흐”, 즉 호흡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자신의 생명이 사람과 다시는 사람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생명을 빼앗고 거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근심과 한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령한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육신을 입었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거두어지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살았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왜 당시의 인간들이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의 대상이 되었을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2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을 통하여 사람들이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누가복음 20:35-36에 나타나 있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는 천사들은 사람들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경건한 셋의 자손들입니다. ‘사람의 딸들은 불경건한 가인의 자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라는 뜻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사람의라는 말은 사람의 욕구, 즉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가인의 후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셋 계열의 경건하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별하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도 사람의 딸들과 통혼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아가야 하는 구별된 백성들이 이 세상과 결탁하고 그들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가인의 후손들은 일부다처제를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통혼과 욕구에 의해서 분별없이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런 일들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비단 결혼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당시 사회가 세속적인 경향과 기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가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를 따르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고 놀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도 물질과 세상의 명예, 안정 위주의 삶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4절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네피림이라는 말은 오늘 본문과 민수기 13장에만 언급됩니다. 이는 거인이라고 통상적으로 해석합니다. 초기 헬라 번역본들을 보면 기간테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졌는데, 이를 자이언트즉 거인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런데 네피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직역 해 보면 타락한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거인의 의미보다, 타락하고 자신의 힘으로 불법을 행하고 폭력을 일삼는 자들을 네피림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그 당시에 용사며 명성을 떨쳤다는 말은 그 사회의 타락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이, 힘만 있으면 존경받고 착취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사회였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의 주축이 되는 사람들이 네피림이었습니다. 이런 존재들이 주축이 되는 이 세상의 어디에도 주님을 신뢰하고 찾는 모습이 조금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5절에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한탄하고 근심하는 모습들에 악한 것들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들은 전혀 없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품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생명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되십시오. 은혜의 대상이 되십시오. 노아는 의인이며 당대의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갔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이기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완전한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완전함은 상대적인 뜻으로 봐야 합니다. 분명히, 사람들 가운데 완전하며 흠 없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이런 노아가 완전하다고 불렸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삶이 노아에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모두가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자신만이라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기를 노력하며 살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완전한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주변 상황에 따라서 바뀌고 합리화하고 타협하며 살면 안 됩니다. 세상과 동참하면서 죄를 저지르고 살아가는 것,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근심하십니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따돌림을 들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때, 은혜의 대상으로서 주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아가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은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은혜 입어야 은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은혜 입고 구원받았습니다. 언제나 어떠한 상황과 환경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 입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을 사모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은혜를 갈구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노아는 그 시대에 외롭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노아는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은혜의 대상이 되어 그 은혜를 날마다 사모하며 성경이 교훈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 건강한 교회와 함께 이루어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