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읽은 시편 57편 앞에는 이 시편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믹담시라고 하는 것은 본문을 작성한 다윗뿐 아니라 본문을 읽은 모든 독자들의 마음에 새겨둘 만한 교훈과 금언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인도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인도자는 공적예배의 찬양을 인도하는 지휘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알다스헷이란 말은 수많은 곡조 중에 한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멸하지 않는다’, ‘파괴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절박하고 슬픈 상황을 겪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절박함과 슬픈 상황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윗의 심정을 알다스헷에 맞추어 표현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다윗의 극심한 고통의 상황과,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그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시를 읽는 우리들은 이 시가 믹담시라는 것을 기억하며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다윗은 세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울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광야의 수풀에 숨기도 하고 동굴 속 깊은 곳에 숨기도 하며 작성한 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다윗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의지할 것은 하나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이 있어야 자신이 살 수 있다며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전도서 9:4). 다윗의 상태는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곳도 없고 피할 곳도 없으며, 위로받을 곳도 찾지 못했던 다윗의 상태는 결코 죽은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두렵고 힘겨운 모습이었습니다. 위로받을 곳도, 의지할 곳도 없이 13년이나 되는 시간을 쫓겨 다녀야 했으니, 다윗은 육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겪고 있는 다윗의 심정은 본문 6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여기서 영혼이 억울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계속해서 찾아오는 죽음의 위협 때문에 찬양이 끊어지고 믿음과 신앙상태도 바닥이 되고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과 고난으로 인하여 짓눌리고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시험과 고난을 이길 만한 믿음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다윗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끊임없이 계속되는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하다보니 영적으로 피폐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은 육체적인 고통과 고난의 순간에 영혼이 피폐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짊어지기 무거운 짐 때문에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기도 합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은 자꾸만 미루어집니다. 그래서 영혼이 피폐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다윗이 이러한 상태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찾고 붙잡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한 상황과 영혼이 피폐할 만큼 힘든 자신의 상태를 호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문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육신은 고통과 힘겨움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는 마음에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 여기서 확정되었다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서 다시는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영혼이 피폐될 정도로 흔들리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두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고난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는 포기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인생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고 그분의 능력과 살아계심을 목도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이러한 결심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굳은 결심을 실천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누가복음 9:51).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 오셨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심적인 고통과 육적인 아픔들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잔이 피해갈 수 있다면 피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찬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사명 앞에 굳은 결심을 하고,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다윗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1). 다윗은 수풀에서도 피하고 동굴에서도 피해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자신에게 안심을 주거나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피해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다윗에게 안전하거나 편안한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줄 수 있는 장소도 없고, 자신에게 편안함을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윗은, 오직 주님의 날개만이 유일한 피난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찾거나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2). 성도들은 위험에 처한 병아리들이 어미 닭 날개 아래에 피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며 그분의 보호하심 안에 거할 때 편안함과 만족감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회복을 경험하며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며 그분만 의지하겠다는 다윗의 결심은 새벽을 깨우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집니다(8). 깨어있는 믿음이 여호와의 능력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새벽을 깨운다는 말씀 전에 비파와 수금도 깨라고 고백합니다. 비파와 수금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악기입니다. 그동안 힘겨운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했던 다윗이 비파와 수금에게 깨라고 하는 것은 다시 찬양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벽을 깨우겠다는 것은 잠잘 수 없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겠다는 결심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광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확고부동한 믿음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천하여서 하나님의 만지심과 회복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