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봉독한 갈라디아서는 마틴 루터가 최상의 책이라고 칭찬하고 사랑했던 성경입니다. 당시 로마가톨릭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감격으로 인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신득의를 확실하게 깨닫도록 가르칩니다. 갈라디아서의 구약적 배경은 하박국 말씀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글을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가 인용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당시는 긴박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핍박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교리적인 부분에서 순수성을 변질시키고자 하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해서 아직까지 신앙이 깊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공격했습니다. 사도행전 151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여기서 어떤 사람은 율법주의자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침투하여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세의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복음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진 않으나 변질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흔들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이 알게 되어 급한 마음에 편지를 썼습니다. 7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6절입니다.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31절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은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고,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서신은 특징이 있습니다. 서론 부분에 감사가 등장합니다. 성도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며 성도를 격려합니다. 하물며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도 바울은 감사를 표현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은사적인 문제, 성찬의 문제, 음란 등의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교회를 향해 감사했던 것이죠. 빌립보 교회는 성도 간의 갈등의 문제가 있었음에도 바울은 감사를 표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다릅니다. 감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겪는 혼란과 유혹으로 인해 곧바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들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에 대해 바울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감사를 표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까요? 이들이 쉽게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가 어쩔 수 없이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속히 떠났습니다. 이는 현재형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미 떠났고, 지금도 떠나고 있는 상태에서 율법주의자들이 가르쳐준 대로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믿음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율법의 행위를 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로마서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 죄를 깨닫기는 하지만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미 복음을 받은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한 다른 복음을 속히 따랐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의 의미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복음과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복음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단들이 전하는 복음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따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구원의 진리가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의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은 유일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만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성도를 교란합니다. 바른 복음의 열매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복음은 죄에 짓눌려 고통당하고 있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평강을 누리게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3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교란하게 합니다. 교란하게 하는 것은 혼동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와 바른 길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란을 일으키고 진리의 길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합니다. 변하게 한다는 말은 정반대 방향으로 돌려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의 백성 삼아주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바른 방향을 바꿔 정반대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고 죄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니 율법주의자들은 믿음에 할례와 율법의 행위를 덧붙임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인간의 것이 첨가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되면 안 됩니다. 구원의 부분에서는 인간적인 편의가 하나라도 들어오면 안 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칭찬이나 감사의 말들은 하지 않고 급한 마음속에서 이단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성도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만들어서 우상 숭배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출애굽기 328절을 보면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살아계심, 능력과 은혜를 다 보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주님께서 명령하신 길로 가고 있고, 끝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의 명령을 속히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했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성도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입니다. 당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갈라디아 성도들이 쉽게 변질되었습니까? 인간의 심성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 예수 믿는 자들도 안심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 심성에 타락할 수 있는 도화선이 있음을 인정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진리를 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위험을 받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예방적 대안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의 은혜의 감격으로 인한 감사를 간직해야 합니다. 하늘나라 갈 때까지 이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살면서 변질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끊임없이 믿음의 성장을 이뤄야 합니다. 성도 모두가 참 진리의 사람으로 세워지기 위해 부단한 수고와 노력이 되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가정법을 사용하여 가혹한 표현을 씁니다.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다시 한번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합니다. 직설법을 사용하여 강하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고 매일매일 복음의 유일성을 믿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길을 따라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