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이야기를 하며 교제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를 숨기셨고, 구속사와 관련된 때에만 부분적으로 나타나 보이실 뿐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번 찾아와주셨고, 그때마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 앞에 보여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뵙고 만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개명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이름이 고상한·고귀한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진 아브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 의미의 아브라함으로 그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사라 역시 원래는 나의 공주라고 하는 의미의 사래였으나, ‘열왕의 어미라고 하는 사라로 개명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전부터 약속하신 창대의 축복, 충만한 자손의 축복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자식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면서까지 후손에 대한 보증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 신앙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에게 이러한 신앙을 지켜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믿음이 흔들릴 수 있고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며 믿음을 굳건히 하고 지켜내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뵐 수 있고 언약을 기억할 수 있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모하며 살아감으로 인해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두 천사를 거느리고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일은 횃불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을 개명하시고 할례 언약을 맺으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당시 풍습에 따라 그들을 영접하고 최선을 다해 대접합니다. 그때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울 때였고, 아브라함은 99세의 노령이었지만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극진한 대접 뒤에 약속이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아왔던 이전과는 다르게 내년 이맘 때라고 하는 구체적인 약속 성취의 시기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년 이맘 때,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사라는 이 말씀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라는 당시 임신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의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눈에 보이는 소망이 다 사라졌다 할지라도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면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전과 달리 구체적인 시기까지 언급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사라가 이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 마음에 믿음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구체적인 시기까지 언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굳이 구체적인 시기까지 언급하시면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현실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11:1).

    사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허탈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공허한 웃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때가 되자 사라에게 기쁨의 웃음, 바로 이삭을 주십니다. 이삭의 이름은 기쁨의 웃음이란 의미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허탈한 웃음을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참 기쁨의 웃음을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참 신앙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그 상황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관점으로 판단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의지하고 그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신 하나님의 때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그 불신앙을 책망하십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속까지도 다 알고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참 믿음을 보이기 위해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믿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부터 믿고 입술로도 고백하고 행위로도 따라가는 신앙과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그 믿음의 표현들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능하지 못하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다니고 예배도 드리지만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확신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강을 내딛을 때도 확신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때 홍해와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여리고성 역시 확신 없이 돌았다면 무너질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확신대로 돌고 말씀대로 행하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확신이 없어서 불안한 모든 것들을 이겨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질 때, 그것이 참 믿음이 되고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나의 인격과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문제와 시간과 계산까지도 올려놓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올려놓는다면 그것이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돌보시고 말씀하신대로 사라에게 행하시자, 사라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돌보셨다는 것은 다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다시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불안하고 암담할 때, 우리는 주님을 믿으며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찾아와주실 줄 믿습니다. 그날이 속히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사람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날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으로는 경험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려지고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위해서 기쁨의 웃음을 준비하셨듯이, 우리를 위해서도 밝은 미래와 소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오늘의 현실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