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말씀을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라를 강조하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사해와 갈릴리 바다가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물의 순환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사해는 받기는 다 받는데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염분이 높아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반면에 갈릴리 바다는 늘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생물들이 잘 삽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 주라고 하신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과 사랑과 자비에 대한 교훈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면 산상수훈은 율법의 완성적 측면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반면 평지설교는 성도에게 합당한 자세의 관점에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마땅한 삶은 사랑과 자비의 삶입니다. 신앙은 실제 삶의 열매입니다. 그 중 하나의 열매가 바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사랑과 자비에 대해 어떤 교훈을 줍니까?

  첫 번째로, 27-29절은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정신적인 영역입니다. 이는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원수를 미워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도 선대해야 합니다. 이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레위기 19:18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율법적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하며 나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다음으로는 물리적인 영역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뺨을 치는 자에게 반대편 뺨도 내어주어야 합니다. 내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내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늘 손해보고 바보처럼 살아야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과 불의를 정당화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의 부조리들을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 징계와 처벌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36입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는 칼의 필요성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3:4을 보면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종합해보면 아무리 사회적으로 책임을 묻고 법에 의해 처벌을 한다할지라도 그 속에 사랑의 원리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매를 들어야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왜 징계 가운데서도 그 중심에 사랑이 있어야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 받은 사랑을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로마서 12:17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후 문맥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하며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용서를 생각해볼 때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30-31절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웃의 요구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말고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서 상대방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해주길 바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즉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남에게 대접하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히 죽어야 마땅할 죄인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자기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37절에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공의가 세워져야 하고, 진리를 수호해야 하며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은 책망해야 하지만 사사로운 것으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정죄 받아야 할 자인데 도리어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이미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사랑의 원리를 따라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고,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38절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처럼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어야 합니다.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니 이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누구에게든지 어느 때에라도 어디에서라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 38절은 다른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심은대로 거두는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과 풍성한 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